'Cool heads but warm he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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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g 2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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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대식

원래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이라는 말은 영국의 경제학자 앨프레드 마셜(1842-1924)에 의해서 탄생된 경제학 용어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경제학 용어다운 설득력 있는 합리성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는 경제학에서만 통용되는 말일까.
차가운 머리가 통찰력을 의미하고 뜨거운 가슴을 타인과의 차이를 인정하는 따뜻한 배려라고 한다면 이 용어는 우리 생활에 두루 적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봄, 어느 화창한 주일 아침, 그날도 나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예배에 참석하여 마음을 집중하려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은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릿속에는 수많은 감사의 조건들이 빠른 속도로 뇌의 회로를 오가며 나를 일깨운다. 그날도 그랬다.
수많은 감사의 조건들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환한 모습으로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름다운 파노라마로 펼쳐지던 감사의 영상이 사라지고 어둡고 침울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단상의 십자가가 희미하게 느껴지더니 그 위에 한국 교회의 추한 모습과 아무 판단 없이 맹종하는 수많은 성도라 칭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부끄러워지면서 얼굴이 달아오르고 이러고 있는 내 모습이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당황했다.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예배에 집중할 수 없고 순서 하나하나가 은혜롭지 못했다. 많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방금 어떤 '위선의 터널'을 지나온 것은 아닐까?
예배를 마친 후면 뭔가 후련하고 상쾌하던 마음이 무겁고 침울했다.
요즘 많은 사람이 타락하고 변질된 현대 교회의 모습을 성토하고 있다. 대형 교회의 세습, 어마어마한 교회 재산을 두고 갈등하는 교인과 지도자들, 교회 내의 문제를 교회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작태 등등- - - -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는 추문들로 오늘날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배척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교인들은 이런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부끄러운 민낯이 아닐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랑을 강조하여 가르쳤지만, 교인들 간의 다툼은 세상의 어느 단체의 쟁투보다 더 극렬하고 치열하다. 그 어느 법보다도 우위에 있는 하나님의 법을 팽개쳐 두고 세상의 법으로 판단 받고 결정하려는 모습은 분명히 은혜롭지 못하다.
* * *
며칠 전 나는 페이스북에서 정유석 정신과 의사가 올린 '참여 관찰자'라는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하고 있는, 무심코 지나쳤던 부분들을 아주 간결하고 명쾌하게 짚어 주었다.
일부를 인용하면- - - -
'- - - - 언론학에도 '참여 관찰자'라는 개념이 있다는- - - - 기자가 객관적인 자료에만 의지하거나 피상적으로 쓰지 않고 취재 대상에 뛰어 들어가서 같이 경험 하면서 관찰한 결과에 따라 기사를 쓰면 더 생동감 있고 뛰어난 기사가 나올 수 있다는 - - - -'
'정신 의학에서도 - - - '참여 관찰자'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 - - 치료자의 자아는 환자를 치료하는데 항상 '참여하는 자아'와 '관찰하는 자아'로 자동으로 나뉘어서 동시에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 '
그 글을 읽고 나는 기독교 안에서 '참여하는 자아'와 '관찰하는 자아'로 '참여'와 '관찰'의 관계를 짚어 보려고 애썼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언론인이 더 생동감 있는 기사를 쓸 수 있듯이, 또 정신과 의사가 치료자의 자질이 높아지듯이 기독인으로서의 분석과 판단을 더 정확하게 도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결국 정유석 박사는 '좋은 치료자는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머리'를 동시에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라고 결론 짓는다. 모두에 언급한 앨프레드 마셜의 경제학 용어와 같은 맥락이다.
기독인으로 기독교의 부끄러운 부분과 추구하는 가치 사이에서 '차가운 머리(Cool heads)와 뜨거운 심장(Warm hearts)'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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