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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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g 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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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진

8.15 광복절이 되면 생각나는 분들이 참으로 많다. 광복절의 광복은 “빛(光)을 되찾음(復)”이라 하여 주권을 되찾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이다.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에 맞서 끝임없이 다양한 독립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의 희생들이 있기에 일제로부터 광복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분이시다. 그의 문화재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한국 미술사를 거론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바로 ‘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하는 것일세.”
일제강점기 시대에 간송은 평생의 스승 위창 오세창 선생의 위와 같은 말을 새겨듣고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겠다는 결심을 하며 일본으로 속수무책으로 유출되는 우리 문화 유산을 수집하는 데 평생을 헌신하신다. 당시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대감식안이었고 한학에서 대가였던 대학자 위창 선생과의 만남은 참으로 극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위창의 조부 역매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직계 제자였었고 추사의 안목과 미감, 그리고 정신의 고고함이 고스란히 간송에게 연결되어 간송은 평생토록 인의예지의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그토록 어려운 일제강점기 시절에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23세의 나이에 조선의 최고 부자 중 하나가 되었지만, 간송은 사적으로 호의호식을 하지 않았다. 민족을 생각하고 문화를 수호하는 ‘문화 독립운동’의 확고한 의지를 평생 문화재를 수립하는데 표명하였다. 가치를 매길 수 없이 귀중한 민족 유산이라고 판단될 경우 중요한 가산을 처분하는 일마저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은 간송의 수집품들은 우리나라 민족 문화사를 관통하는 거의 모든 시기의 거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구입했다는 특징이 있다.
1938년 8월에 설립한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은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이름에 상응되게 한국 최초의 개인 박물관이자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들 중 하나이다. 그 당시 서울 한복판인 성북동 97-1에 위치한 보화각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은 물론 청자상감운학문매병과 같은 고려 청자들, 조선백자들, 삼국시대의 불상들과 고려시대의 석불들,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담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서화들, 그림보다도 아름답다고 하는 추사 김정희의 예서와 중국의 산이 아닌 우리나라의 산을 담은 겸재 정선의 산수화 등은 그냥 보기 좋고 재화의 축적인 예술품을 지켜 낸 것이 아닌 예술적 가치를 넘어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 정신을 지켜내신 것이다.
간송은 또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사학인 서울의 보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하는 등, 민족의 교육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황해도 연백평야의 3천석 전답(약 60만 평)을 바탕으로 동성학원을 설립하여 위기에 처한 보성 인수에 나선 간송은 마침내 1940년 8월 보성학교를 인수했고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본 총독부로부터의 온갖 탄압등 갖은 고난을 이겨내면서 민족 교육의 불씨를 유지해 나갔다. 또한, 효제동 동화 인보관의 양로원 등 수많은 기관에 기부를 하면서 구제 사업도 힘을 썼다고 한다.
해방을 확신하며 국보들과 보물들을 지키기 위해 막대한 전 재산을 바친 간송 전형필 선생은 해방후, 그리고 한국 전쟁후 점점 더 어려워지는 재정적 압박을 홀로 감내하면서도 매달 간행되는 ‘고고미술’에 원고를 써서 후학을 독려하면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 했으며 나라의 미래인 학생들을 위한 교육 사업에 헌신을 다 하였고 어려운 서민을 위한 구제 사업에도 관심을 계속 기울이셨다. 간송은 문화 예술의 학적 체계화가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으나 1962년 급성 신우염으로 서거하신다. 같은 해 간송의 사회에 대한 공적과 문화재 수호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추서했으며, 2년 후에는 보성학교를 지키고 발전시킨 업적으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국민장(지금의 국민훈장 동백장)을 다시 추서하였다.
‘물 흐를 澗’에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의미를 가진 ‘소나무 松’을 써 간송이라는 호를 위창 선생에게 선사받은 간송은 변하지 않는 열정과 의지로 끝까지 민족의 얼과 정신이 담긴 문화재와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집결해주는 유대의 의미가 담긴 연결고리를 유산으로 남겼으며 현재의 우리의 모습까지 재정립시켜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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