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보병학교 일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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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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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주대식

1969년 3월 x일
일기를 쓰고 있는 나를 보고 내무반 동료가 웃었다.
나도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는데 까지, 갈 것이다.
언제 구대장이 들이닥칠지 몰라 마음이 조급하다. 다시 말해서 일기를 쓴다는 것은 몰래 하는 짓이다.
왜 그런지 이러한 무의미(?)한 행위에 애착을 느낀다.
식사는 양이 적어서 배가 고팠는데 점심에는 거친 밥을 먹지 못하는 동료의 밥을 얻어먹었다.
누군가가 PX를 출입했다는 이유로 단체 기합을 받았다.
벌거벗고 냉방에서 두 시간여 떨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빵을 사 먹었다는 것이 무슨 큰 죄라도 된단 말인가. 이런 기합은 그럴 수 있다는 수긍보다는 분노가 앞선다. 군 훈련을 수양(?)이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몽둥이, 벌거벗기기, 선착순, 오리걸음 - - - -
여기가 무슨 나치 수용소도 아니고 - - - - -
3월 12일
어제(?) 1:00 AM에 취침, 아침 5:00 기상, 수면시간 총 4시간.
LMG 사격술 예비 훈련, 사격수부 기입법(이게 뭔지 생각나지 않음), 이런 교과 과정이야 배워야 할 것이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눈보라 치는 산꼭대기에서 2시간가량 그대로 서 있어야 하는 기합, 벌판에서 치고 골라오는 모진 바람과 우박, 그런 상황 속에서 배낭 지고 M1 소총 2개(하나는 힘들어하는 동료 것 들어 준 것임)를 들고 걸어야 하는 행군은 수행과정이었다.
얼어 오는 손가락, 숨 막히는 바람, 눈을 뜨지 못 하게 하는 싸락눈- - - - -
그리고 스스로 도취한 교관의 웅변성 훈시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은 교육이라기보다는 '벌'이다.
속으로 화를 내기도 했고 바보 같이 웃기도 했고 때로는 멍청하기도 했다.
3월 14일
항상 배고픔에 쫓기는 요즘, 오늘은 우연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깊은 산골, 가게 같지 않은 가게에 들어앉아 너무 오래되어 상했을지도 모르는 빵을 마구 삼켰다. 삶은 달걀도 몇 개- - - -
솔직히 말해서 요즘 식사량이 너무 적다. 배고프다.
야간 독도법은 재미있었다. 컴퍼스 한 개와 지도 한 장만 가지고 목표 지점을 찾아가는 밤의 산골길, 공동묘지도 지나고 논도, 밭도 지나면서 별빛을 보고 걸었다.
쌀쌀한 밤기운 속에서 웃통을 홀랑 벗는 기합을 받을 뻔했지만 중대장의 배려로 무사히 넘어갔다.
잠깐이었지만 알 철모에 상의 완전 탈의, 그리고 선착순- - - - - 그것도 교육의 일환인가.
어제 사타구니에 발길질 당한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분하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수긍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에 지나지 않았다. 왜 하필이면 거기냐구- - - - -
이러저러한 분노, 울분, 피로의 누적- - - - 뭐 이런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교육 과정이니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누구 말마따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하는 말도 있으니 재미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소대장 근무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소대원들을 교육시키고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생각하면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그러나 이제는 무슨 배짱인지 한번 당해 보자는 결기가 선다.
오늘 학과 시간에는 줄곧 M과 같이 있었다.
늘 하던 음대 친구들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3월 15일
토요일은 좀 쉴 수 있으려나 했는데 기대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사령관의 정신 훈화, 그 우스꽝스러운 언변에 감동받을 자가 누가 있을까.
시끄러운 취침 점호가 끝났다. 잘 일만 남았다. 내일은 일요일인데 또 무슨 일과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한밤중에 잠이 깼다. 으슬으슬 춥다.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나는 일기책을 펼친다.
오늘 밤은 왜 이리도 처량하게 비까지 내리는가.
앞으로 며칠 동안은 또 사정없이 추울게 아닌가.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에 많이 단련되었다.
인내를 쌓아가는 과정, 이를 견뎌낸 성취가 주는 만족은 크다.
보병학교 입소 첫 달 훈련 받는 과정 중에 적어 놓은 일기를 보니 그래도 꽤나 잘 견뎠구나 싶다.
그땐 젊었었지.
문득 헤밍웨이가 말한 어록이 생각난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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