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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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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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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식

그러니까 그게 벌써 한 3년전 쯤 되는 것 같다.

우리 부부는 모처럼 어느 단체 골프여행에 동참할 기회가 있었다.

아이다호주 깊숙한 산골짜기, 산 좋고 물 좋은 저 외진 곳, 사람들의 소음이 아득한 호숫가, 풍광은 아름답고 공기는 신선하고 하늘은 맑았다. 때는 바야흐로 녹음이 방창한 한여름.

한여름이라 하여도 그 곳은 고산지대가 돼서 그런지 그리 덥지 않았다.

적막 속에 가라 앉은듯한 산 속에는 피부를 간지르는 미풍이 그치지 않았고 오랜만에 외출한 우리 부부는 마치 소년 소녀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산골짜기를 휘돌아가며 그러안은 호수 물은 조금 과장해서 바다 같았고 물빛은 사파이어 보석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가끔 물보라를 내며 달리는 모터 보트가 산골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 

우리는 골프를 마치고 전망 좋은 식당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골프를 마치고 마시는 맥주 자리에 중년(사실은 노년)들의 화제는 대부분 싱거운 농담이나 '왕년의 금송아지' 얘기가 보통인데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어 한창 껄껄 거리며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쯤 누군가가 슬그머니 내게로 접근했다.

'주형! 우리 저 쪽에 가서 '따로 한 잔' 합시다.'  그가 청했다.

나는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그 동안 잠간씩 주고 받는 안면도 있고 해서 성큼 그러자고 하고는 자리를 옮겨 앉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멀찌거니서 그의 언행을 보며 한 번쯤 가까이 해도 괜찮은 인품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이 번 골프여행에서 처음 만난 사이인데 듣자하니 술도 좋아하고 골프도 좋아하는, 말하자면 나와 성향이 비슷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옮겨 앉은 자리에서도 뭐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저런 잡담을 주고 받으며 뭔가 통하는 넉넉한 분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사실 나는 조금 신경이 쓰였다.

좀 있으면 저녁 식사 시간인데 다른 친구와 저녁 약속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따로 한 잔 하자고 호의를 보인 것에는 고마웠지만 좀 더 시간을 같이 할 수 없는 것이 미안했다.

저녁 약속 시간은 다가 오는데 나도 자리를 깨기가 싫었다.

그 때 저쪽에서 집사람이 저녁 약속을 알리는 사인을 보낸다.

나는 사실을 고백하고 아쉽지만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약간 서운해 하는 눈치였다.

헤어지면서 그는 또 다시 '따로 한 잔' 하자고 청했고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단체 여행이 늘 그렇듯이 여러가지 여흥 프로그램과 이어지는 골프 라운딩 때문에 따로 만날 시간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어느덧 여행이 마무리 되었고 '따로 한 잔' 하자는 약속은 허공 중에 산산히 부서진 허언이 돼 버리고 말았다.

집에 돌아 와서도 가끔 그의 얼굴이 떠 올랐고 은근히 따로 한 잔 하자던 그의 제안이 뇌리에 어른거렸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연락을 해서 상봉이 이뤄질 수도 있었지만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그에 대한 기억은 스멀스멀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한 1년쯤 지났을까 그 여행에 동행했던 친구로부터 그의 부음을 들었다.

갑작스레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멍-했다. 아쉬움과 미안함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아는 것이 있다면 식당에서 잠간 나눴던 대화(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와  '따로 한 잔' 하자던 그의 제의에 그러자고 응했던 몇마디가 전부다.

끝내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기다려 주지 않고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왜 자꾸 따로 한 잔 하자고 했을까.  그는 따로 만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새벽 4시다.  노인이 다 된 나는 아침 잠이 없어서 아직도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워진 창밖을 내다보며 그의 얼굴을 떠올리곤 한다. 

뭐든 뒤로 미루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코로나 때문에 왕래가 제한된 요즘 서로 자주 만난다는 것이 어렵지만 혹시라도 만나자는 사람이 있다면 즉시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만날 일이다.  다음에 만나자는 얘기는 안 만나겠다는 말과 같다고 한다.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찍을 일이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내일을 장담할 수 없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바로 그와의, 그녀와의 약속을 서둘러 마련할 일이다. 

그들은 날 기다려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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