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나의 인생길은 천벌이었다”

  • .
  • Jan 26, 2022
  • 3 min read

글: 강현진


옛 노인들이 말하기를 부모형제와 생이별하고 사는 사람들은 전생에 지은 죄가 크기 때문에 현생에 천벌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옛 노인들의 말대로 천벌을 받고 있다.내가 언제 무엇을 잘못하여 천벌을 받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천벌을 받는 것만은 사실이다.

내가 천벌을 받기 시작할 때는 내 나이 겨우 10살 남짓한 소년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큰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50년 넘게 세상 사람들에게 내 죄를 면해달라고 호소했건만 아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나의 가슴속에 맺힌 울분과 분노를 보고 미쳤다고 하는 사람, 절망과 고독에 휩싸여 죽으려고 목에다 멘 밧줄을 당기려고 하는 사람, 내 가슴에 쓰인 피난민이라는 주홍글씨를 보고 웃어대는 사람,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는 나를 정신 못 차린 인간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많다. 나는 정말로 억울하고 원통하다.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나에게 주어진 천벌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것인지 판단해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피고인으로 최후 진술을 하겠다. 세상 사람들. 나에게 심판해 달라. 나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읍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다 1950년, 다음 해 51년 1월달, 눈보라 치고 칼바람이 부는 엄동설한에 고향에 어머니, 누님 3명, 동생 2명을 두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목선을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피난 오면서 몇 번이나 바다에서 풍량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한 땅 속초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내려가 피난민 수용소에서 2년을 살았다.

수용소에는 수백 명이 좁은 창고에서 지냈는데 당시 피난민들에게는 먹고 자는 것이 말이 아니었다. 먹는 것은 고작 꿀꿀이죽이었고 덮고 자는 것은 가마니 2장을 가지고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다.

피난민들은 곧 전쟁이 끝날 줄 알았는데 장기화되면서 그곳을 떠나 산꼭대기 천막촌에서 또 몇 년을 보내다 보니 휴전이 되고 피난민들은 결국 실향민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만 했다. 나는 매년 1월만 되면 미칠 것 같다. 달력에서 1월이라는 숫자가 없었으면 좋겠다. 피난민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달이고 그때만 되면 가슴속에서 울화통이 터진다.

나는 그런 고통과 고생 속에서도,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담배꽁초 장사를 하며 고생했으나 교육열만은 대단하여 나를 대학에 보냈다. 당시 50년에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나 훌륭한 아버지 덕분에 대학을 졸업하고 ROTC장교로 근무했고 학교에서 얻은 교사 자격증으로 사회에 나와 별 고생 없이 살았으며 경기도에서 18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다 83년에 이곳에 이주했다.

나는 지금까지 육체적 고통 없이 살았지만, 정신적으로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 누님, 동생 생각 때문에 한 시간도 마음 편히 살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평생 남모르게 울며 살았다. 어렸을 때는 고향의 가족 생각 때문에 울었고 철이 들면서는 가족 생이별에 대한 원망 때문에 울었고 지금은 통한의 슬픔 때문에 울다 보니 급기야는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였다.

나는 지금도 처자식 모르게 밤마다 운다. 나도 모르게 밤이면 우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다. 마음속으로는 울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래도 자신 모르게 울다 보니 급기야는 7년 전부터 눈에 이상이 생겨 한쪽 눈은 실명되었고 한쪽 눈만 겨우 보며 살아가고 있다. 의사는 나의 병명이 황반변성이라고 했다. 내가 앞으로 볼 수 있는 기간은 3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지금 나는 1년에 4번, 3개월에 한 번씩 눈동자 주사로 시신경과 눈동자(황반)를 부쳐주는 주사를 맞지 않으면 실명된다고 하면서 절대로 글 쓰는 일과 책 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래서 의사 말대로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요즘도 차로는 20분 거리의 병원에 버스를 타고 왕복 5시간을 오고 가는 동안 창밖을 내다보며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내 불행한 삶은 어디에서 왔으며 언제쯤 끝날까 생각하며 나의 운명적 비극이 서러워 울고 또 울다 집으로 돌아온다.

이 울음은 나만이 아니라 고향을 북에 두고 온 실향민 모두가 겪고 있는 고통이고 그 고통은 피난민들만 아는 비극이라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1951년도 피난민이 7백만 명이던 것이 지금 생존한 사람은 10만이 안 된다고 한다.세월이 70년이 넘은 지금도 내 조국 하늘 아래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 소리, 부인이 남편을 찾는 애통한 울부짖음, 동생이 누나를 찾는 애원의 소리가 메아리쳐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러나 대답은 없고 허공을 떠도는 메아리만 울려 퍼지고 있다. 나는 지금 인생의 종착역에 접어들었으나 아직도 70년 전 소년 시절의 환상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울고 있다. 내 조국이 내린 천벌은 그렇게도 모질다. 지금 어느 곳에서도 알 수 없는 실향민들의 울부짖는 고통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내 조국에 부탁한다. 다시는 6.25와 같은 동족상쟁이 일어나지를 말기 바란다. 그러나 지금도 서로가 총을 겨누고 핵무기를 개발하여 어떻게 하면 동족을 더 많이 죽일까 연습만 하는 북한 공산정권의 헛된 망상이 멈춰주기를 바란다. 6.25 같은 전쟁은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하고 나처럼 천벌 받는 사람이 다시는 이 땅에 없기를 바란다.

끝으로 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병원으로 차를 태워준 친지들에게 감사드리며 내 글을 통하여 상처받은 사람에게도 사과하며 지금까지 변변치 못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에게도 감사드린다.

Comments


Hyundae News USA   (415)515-1163  hdnewsusa@gmail.com   P.O. Box 4161 Oakland CA 94614-4161
                                                                                                                           ©Hyundae News USA all right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