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늙음이 벌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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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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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pr 1, 2021
이계숙의 일상

늙으니까 없던 병도 생긴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들이. 최근 '비문증'이란 게 생겼다. 이런 병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는데. 머리카락 같은, 수십 마리의 모기떼 같은 얇고 긴 검은 물체들이 눈앞에서 왔다가 갔다가 하는 형상이라면 이해가 쉬울까. 어느 휴일, 처음, 이 증상이 나타났을 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눈을 비벼봤다. 티끌이나 머리카락이 들어간 줄 알고. 컴퓨터 화면을 너무 많이 들여다봐서 눈이 말라서 그런가 싶은 생각이 퍼뜩 들어 안약을 넣고는 한참 기다려봤다. 짠, 하고 머리카락이랑 모기가 깨끗하게, 말끔하게, 시원하게 사라졌길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 망할 것들은 여전히 눈앞에서 너울너울 신나게 춤을 췄다. 빚쟁이처럼 끈질기게 붙어있다.
궁여지책으로 맑은 물로 눈을 씻어내 보았다. 증상은 여전했다. 눈동자를 치켜뜨거나 내리깔거나 옆으로 돌려 봤다. 눈동자 움직이는 방향으로 계속 그 부유물들은 따라온다. 씻어내고 휴식을 취해보고 안약을 넣어보고 해볼 만한 짓은 다 해봤다. 이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큰일 났구나! 만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 한(내 친구인 검안의가 내 눈을 검사하며 실제로 한 말) 지독히 나쁜 눈인데 이제 탈마저 났구나! 앞을 볼 수 없게 생겼구나!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걸 참으면서 검안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휴일이라 병원 예약도 안 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행히 친구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다급하게 내 증상을 알렸다. 큰일 났다고! 생전 없었던 이상, 요상한 증상이 갑자기 생겼다고! 이거, 눈이 머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내 애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낮잠 자다 깬 목소리로 친구가 느긋하게 말했다.
"플로테스(Floaters)가 왔구먼. 한국말로 비문증. 나도 예전에 생겼었더랬어. 별거 아니야. 걱정 안 해도 되어요. 늙어서 그래. 늙으면 흔하게 오는 증상이야"
방법이 없다는 거다, 방법이. '늙어서 생긴 병'이라 고칠 방법이 없단다. 불치병이란다. 계속 이런 상태로 살라고? 이렇게 불편한 증상을 가지고 살라고? 부랴부랴 전화를 끊고 인터넷을 뒤졌다. 수백 개의 정보가 떴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노환으로 생긴 증상이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단다. 평생 같이 가야 할 증상이라는 거다. 안과에 가보기로 했다. 전문가의 의견을 일단 들어봐야 될 것 같았다. 며칠을 불안과 걱정으로 잠을 설치다가 예약한 날짜에 의사를 보러 갔다. 그래서 의사가 뾰족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냐고? 괜히 갔다. 코페이 20불이랑 아까운 시간만 날렸다. 검안의 친구랑 똑같은 말만 했다. 일반 증상이 발현되면 개선할 방법이 없다는 말. 사물을 보는 덴 지장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기라는 말만.
확인사살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은 참담했다. 눈물이 앞섶을 적실만큼 마구 흘러내렸다. 내 늙음을 절감했다. 사실 나이 쉰다섯을 넘기고부터 늙음의 증상을 자주, 그리고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도 비가 온다는 걸 알아낼 수 있다. 여기저기 온몸이 쑤시고 저리기 시작하니까. 온몸의 관절이 아파서 앉을 때도 설 때도 아이구구, 하는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손끝이 말라서 그릇을 자주 떨어뜨린다. 목이 메어서 국물 없이는 밥을 못 먹겠다. 내 친구 중 일흔여섯 된 할배가 있는데 늘 우는 사람 같다. 이유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자꾸 눈물이 흘러서. 늙으면 마를 데는 젖고 젖을 데는 마른다고 하더니 나도 곧 그렇게 되겠지.
지인 중 하나는 거울 안 본지가 수년 되었다고 한다. 화장실에 가서도 일부러 불을 안 켠단다. 적나라한 늙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언제부터인지 나 역시도 그렇게 됐다. 거울을 보면 좀 나아졌던 우울증이 도질 지경이다. 늘어지고 처진 살, 윤기 잃은 피부, 둥그스름하게 변한 체형, 흐려진 눈빛, 바삭바삭 건조해진 머리카락…. 한 때는 풍성하고 빛나고 탱탱하고 윤나던 것들이 세월에 풍화 작용되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어쨌든 늙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성형수술이란 인위적인 방법으로 몇 년 젊어 보일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까지 하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너희들의 젊음이 상이 아니듯 우리들의 늙음도 벌이 아니다'란 말이 많은 위로가 된다. 그렇다. 우리의 쇠락한 외모는 이 풍진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온 증표다. 결코, 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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