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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들이 많이 아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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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an 7, 2021
  • 2 min read

이계숙 컬럼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를 꼽으라면 중앙일보사를 그만 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내렸던 결정이었다. 신문사에서도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나름 성실하게 일도 잘했고 표면적으로는 기자일을 재밌어하는 것같던 사람이 예측도 없이 사표를 내니까.

물론 재미 있었다. 사고(事故)와 사건을 접하는 일이, 새로운 사람과 인터뷰하는 일이. 특히 인터뷰는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사람한테 관심이 많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이 늘 흥미롭고 새롭다. ‘한 사람이 내게 온 것은 한 우주가 온 것과 마찬가지다’ 는 말처럼 나와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산 사람의 성장배경 및 가치관, 사고방식과 철학 등을 전해듣는 일이. 그들의 삶을 통해 얻을 수있는 지혜와 교훈은 덤이었고.

그럼에도 그만 둔 이유는 영어때문이었다. 한국 신문사인 만큼 사장도 직원도 상대하는 사람도 모두 한국인이다. 게다가 기사도 한글로. 영어가 늘리 없다. 문득 강한 자괴감이 들었다, 내 형편없는 영어실력이. 힘들더라도 미국직장에 들어가야 영어가 늘겠다 싶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 신문사를 그만둔 것이기는 하지만 제일 잘한 일을 또 꼽으라면 신문사에서 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 아이러니하다. 그렇다. 신문사에서 일한 것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잘한 일도 된다. 신문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 때문이다. ‘내 친구할배들’ 말이다. 그들을 빼놓고는 내 미국생활에 대해 말 할 수 없다. 내 할배친구들, 그들은 미국오기 전에는 나름대로 한국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인사들이었다. 송곳 위를 걷는듯한 시청률 경쟁을 견디다 못해 피신해 온 방송국 PD, 이혼한 후 전재산을 정리해 아이들과 미국행을 택한 고교 교사, 가난한 집 장남으로 동생들 뒷바라지에 지쳐 자기 인생을 찾겠다며 밀항해 온 중학교 교사, 어용교수 물러나라는 학생들의 등쌀에 밀려 이민을 결심한 지방의 대학교수 등.

전쟁 직후 국비장학생으로 유학와서 미국 학계에 종사한 박사들, 의사들 서넛도 내 친구였다. 전화 첫 마디를 ‘ 나 김 생원이요’ 하던 한 영문학교수는 한글로 자서전을 쓰겠다고해서 나랑 많은 시간을 보냈고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살인범인 ‘찰슨 맨슨’을 직접 상담했던 미국 정신의학계의 저명한 의사 한 사람과도 깊은 친분을 맺었더랬다. 정치인 김근태, 손학규 씨랑 같은 동기렸던 한 할배. 당시 최고명문인 경기고등학교에서. 서울대를 지망했다가 낙방, 건국대에서 장학금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뭐 그런가보다 했는데 고향의 남자친구가 할배와 같은 대학출신이다. 친구가 말했다. 그 학번은 우리 학교의 전설로 통한다. 대한민국 최고 수재들로 이루어진 학번이었지. 그런 분과 친분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삼아라

기자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림자도 밟아보지 못 했을 할배들과의 인연을 맺으면서 나의 견문은 많이 넓어졌다. 다방면의 지식과 소양도 쌓을 수 있었고. 아울러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사람을 이해하는 폭도 깊어졌다. 할배들은 살아온 세월의 길이 만큼이나, 그리고 그들의 경륜만큼이나 대화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군대부터 시작해서 교육계, 정치계, 재계 등. 시집, 남편, 자식, 쇼핑, 연속극이 대화의 주된 소재인 여자들과는 확실하게 달랐던 거다. 남자들인 만큼 그들 사이에 ‘남성’에 관한 소재도 빠질 수 없다. 하루가 다르게 쇠퇴해지는 성기능, 정력제 등에 관한. 오랜 세월을 같이 했던 때문인지 부끄러움이나 체면, 남녀간의 예의같은 건 애시당초 사라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듣는다. 아니, 듣는 것도 모자라 같이 거든다. 딸 나이 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내 나이 대도 아닌 여자가 여러 할배들과 앉아 ‘바이그라’가 어떠니 ‘팔팔정’이 어떠니, 하는 요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광경을 상상 해보라. 요즘 그들이, 3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했던 그 할배들이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씩 스러지고 있다. 세상을 떠나거나 아주 아픈 상태에 놓여 있거나. 치매에 걸려 가족들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도 있고. 한때는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사람들이, 5월의 꽃처럼 화려하던 사람들이, 사철나무처럼 푸르던 사람들이. 그들을 보면서 우리 인생이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학벌이나 명예나 인물이나 지식이나 재산도 세월 앞에서는,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헛되고 헛되다. 그 헛되고 부질없는 것들을 위해 죽을둥살둥 매진하는 우리들. 중요한 건 오늘인데. 오늘 하루를 즐겁게 충실하게 만족하게 사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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