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 반호떼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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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n 1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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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창간 15주년을 앞두고 생각이 많았다.
직원이 적은 환경에서 행사는 엄두도 안 났다.
더욱이 코로나19가 끝나가지만, 아직 코로나19에 대한 종식 선언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을 모으는 행사는 어렵다.
창간15주년을 어떻게 치를지 고민 하던 중 본국 매체에서 벨기에 남매 입양 기사를 읽었다.
남매가 말기 암과 치매 중증으로 고생하는 양아버지를 모시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미아와 연결되어
창간 기념 특집 기사를 찾던 중 기자의 촉(觸)이 작동했다.
노력 끝에 이야기의 주인공 누나 미아 반호떼와 페이스북에서 만났다.
현재 그녀의 나이는 53세. 7살 때 남매가 입양을 된 것이다.
그녀가 말한 양부모는 그야말로 온갖 노력을 기울여 남매를 잘 키웠다.
입양 초기 미아가 한국말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식사 기도를 한국어로 할 정도로 양어머니의 영성과 지혜는 빛이 났다.
벨기에 부유층에서 태어난 양어머니는 화려한 도시 생활보다 남을 돕기 원해 벨기에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콩고에 가서 10년 넘게 교사생활을 하고 그곳 어린이 13명을 입양할 정도로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고 전했다.
봉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지금의 양아버지와 결혼을 했는데 자녀를 가질 수 없어 장애아도 괜찮으니 2명의 자녀 입양을 계획했다고한다.
지루하고 긴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한국에서 남매가 벨기에 공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남매를 키우면서 많은 곳을 다녔는데 경우 따라 남매가 함께 갈 수 없는 곳이면 양부모는 외출을 포기할 정도로 남매를 정성껏 키웠다.
후일 누나 미아는 간호사가 되었고, 동생은 법대를 나와서 무역업을 하고 식당도 함께 하고 있다.
미아가 7살 때 입양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을 생생히 잘 기억하고 있었다.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미아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보육원에 보내졌고 그다음 벨기에로 입양된 것이다.
벨기에에서 사춘기를 보낸 미아는 정체성과 입양아라는 허탈감에 많은 혼란을 겪었지만 양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잘 극복했다고한다.
그녀가 간호사를 선택한 이유도 후일 한국으로 돌아가 고아들을 돌보려 했다고 고백했다.
물론 그런 꿈이 아직 실현되지 못했지만, 여전히 다른 방법을 찾고 있다.
아마도 모든 입양인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버림받았다는 좌절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보듬어야 할 것이다.
인터넷 소통 시작
거의 3주 동안 미국과 벨기에의 시차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만 인터넷에서 소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잘 호응했다.
주일 오후 교회에서 집에 오니 기다리던 사진이 모두 왔다.
양아버지와 남매 사진, 미아 가족사진, 그리고 한국에서 다시 만난 한국 어머니 사진 등 많은 사진을 통해 그녀의 지금까지 생활의 한 단면을 엿 볼 수 있었다.
기자는 그녀의 사생활에 무엇이라 말할 수 없지만, 그녀가 양부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것만큼은 확실하다.
시작은 어둡게 보였을지라도 좋은 양부모 만나 성인이 되어 행복의 꽃다발을 받았다.
물론 자신과 남동생의 노력은 얼마나 많았겠나.
그리고 받은 사랑을 다시 병마에 시달리는 양아버지에게 쏟고 있다.
남매가 보여 준 양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효도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자기가 낳아서 기른 자식한테도 그런 효도를 받는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든 일인데 어떻게 양아버지를 위해 그렇게 희생할 수있을까.
부모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반대로 자식이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만큼 필요할 때 되돌려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암과 치매를 갖고 있는 89살의 부모가 갈 곳은 양로원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미아의 양아버지는 생의 마지막을 살던 집에서 마무리하고 싶어 했다.
남매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5년 전 양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양아버지 혼자 남았는데 불치의 병을 가지고 인생 마지막을 함께 간다는 것이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받은 사랑만큼 돌려 드려
자신들이 벨기에에 50년 전 입양 되었을 때부터 길러준 양부모의 사랑을 이제는 양아버지에게 돌려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양아버지의의견을 백 퍼센트 존중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식당과 작은 무역업을 하는 동생이 매일 저녁 양아버지를 집에서 픽업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양아버지 집에 모셔다 드리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밤에 혼자 계시다 위급한 사고가 날 수 있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한 달에 며칠 동안은 양아버지가 누나 집에서 손자들과 함께 머무는 동안 동생은 휴식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그 동안 양아버지에게 필요한 주사도 놓고 병원도 방문하고 매일 목욕을 시켰다고 한다.
또한 동생이 지방에 출장을 가면 양아버지 혼자 놔둘 수 없어 함께 다녔다고 했다.
까만 머리의 동양인이 흰 머리의 백인 노인을 데리고 함께 다니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벨기에선 부자지간의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특별히 벨기에 한인사회에서 남매가 그렇게 양아버지를 극진히 모실 수 있는지 부럽기도 하고 감동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미아의 스토리를 쓰면서 역시 한국인의 DNA는 색다른 것이 있다는 자부심도 느끼게 했다.
기자가 지난 주말 산행 후 산에서 비빔냉면을 먹었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위해 냉면을 준비하느냐고 했다.
라스베이거스에 거주하는 본지 칼럼니스트 의사는 버클리 대학에서 공부했던 시절이 생각나는 듯 여기에 와서 노인들 진료하면서 산에가고 냉면 먹었으면 좋겠다는 댓글을 남겼다.
한국인은 좀 다르고 극성스럽다.
그런 열정이 오늘의 부강한 나라 한국과 한국인을 만든 것 아니겠나.
창간 15주년이 오기까지 지역 교민과 광고주들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이민사회의 문화 창달을 위해 헌신해 주신 필진과 애독자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을을 전하고 싶다.
끝으로 '미아 반호떼의 시간'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hdnewsusa@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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