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가주 이민역사의 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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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p 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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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년이면 미주 이민사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인 이민역사도 이젠 상당한 세월이 지났다.
1902년 안창호 선생이 부인 이혜련씨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부두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 이민역사는 이 때를 기점으로 시작된 것이다.
지난 120년 동안 샌프란시스코에 남긴 한인 이민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애석한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이민역사 흔적을 발굴해 보존할 방법은 거의 없다.
이미 이민 역사가 담긴 곳은 개인 집이나 건물이 들어서 완전히 사유재산이 된 곳이라 기념비 하나도 세울 수 없다.
결국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곳에 이민역사를 새로이 만들어야 한다.
중가주(Central California) 리들리와 다뉴바에 한인 이민역사를 기념하는 기념비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하와이 노예 계약이 만료돼 대부분 초기 이민자들이 미국 본토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통해 가장 먼저 온 곳이 바로중가주이다. 농업형 큰도시 프레즈노 인근이다.
초대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장을 역임한 차만재 박사(프레즈노 주립대학교 명예 교수)가 중심이 되어 리들리시와 한국 정부 그리고 일반인들의 후원으로 한인 역사 기념물 세우기 운동을 펼쳤다.
차 박사가 시대적 안목과 역사적 소명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니겠나.
2010년에 세워진 리들리 한인 이민 역사 기념각에는 축소 독립문과 10인의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비석이 있는데 두 명을 추가할 수 있는자리가 있어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의 기념비를 세우는 허가와 준비 작업이 곧 들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장인환·전명운 의사
미국인 스티븐슨은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 있으면서 일제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는 일본의 한국 주권 강탈에 임무를 띠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페어몬트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통치로 한국이 발전하고 있다는 망언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원들이 스티븐슨에게 항의하기 위해페어몬트 호텔로 찾아가 내용 정정을 요구했지만 자기 발언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억지 대답에 화가 나서 스티븐슨을 쓰러트리고 의자를던져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당시 스티븐슨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장인환·전명운 의사는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10분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페리 빌딩에 도착한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를 저격했다.
거사 소식은 미국 신문은 물론 한국에도 전파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쾌한 자의 쾌한 일’이라는 제목으로 첫 소식을 전했고 3월 28일 스티븐슨의 사망 소식과 두 의사의 행적을 상세히 보도했다.
1909년 미국법원은 전명운 의사에게 무죄를, 장인환 의사에게 25년을 선고했지만 1919년 1월 가석방되었다.
이 두 의사의 의거는 만주 땅에도 전해져 한인들의 무력 항쟁에 불을 댕겼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이재명 의사의 이완용 저격에는 큰 영향을 주었다.
후일 전명운 의사는 만주로 떠났고, 장인환 의사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두 의사의 의거는 미주 대한인의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역사적 큰 발자취를 남겼다.
샌프란시스코 한인 회관에 두 의사의 흉상이 있는데 리들리 한인 이민역사 기념각 내 두 빈자리에 두 의사의 비석이 세워지면 북가주 한인 독립운동 역사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는 작업이 된다.
샌프란시스코 한인 역사박물관(SFKAHM)은 중가주한인 역사연구회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한인 독립운동사의 대미를 장식할 계획이다.
윌로우스 한인 비행학교
이민 1세들이 고령화되면서 북가주 지역 이민사 연구와 독립운동 흔적을 보존하는 일도 시간 제한을 받게 되었다.
미국 최초 독립 항공단의 효시인 윌로우스 한인 비행학교 기념관 건립도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
본국 공군과 보훈처에서도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선뜻 지원하지 않고 있어 동포들의 한목소리가 절실히 요구된다.
동포들의 목소리가 작으면 그대로 묻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한인 비행학교 기념관 건립도 범동포적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좀 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캠페인을 펼쳐야 한다.
이민초기 쌀농사로 돈을 번 갑부 김종림의 후원으로 시작된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30여 명의 한인 조종사 지망생이 있었다.
홍수로 인해 비록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지만, 공군력으로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겠다는 선조들의 강한 의지와 열망은 후세들에 의해 마무리되어야 한다.
윌로우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140마일, 캘리포니아 주도 새크라멘토에서 86마일 북쪽에 있는 인구 6천여 명 정도의 작은 농촌으로 벼농사를 대부분 짓고 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가 폐교한 자리에는 ‘Historical School Site, Glen County, Quint’라는 표시를 한 랜드마크가 있고 학교로 사용된건물은 현재 폐기된 목조물로 방치되어 있다.
아직 독립운동 흔적은 여기저기 있지만, 기념비 설치나 기념관 건립이 가능한 곳부터 먼저 손을 써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역사의 흔적은 사라질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한인 역사박물관은 오클랜드 한인연합감리교회 건물에 독립운동 표식비 도안이 끝나 제작을 주문한 상태이다.
샌프란시스코와 베이지역 최초의 한인 독립운동 표식비가 올해 안에 설치될 예정이다.
그동안 박물관의 노력이 첫 결심을 보게 되었다.
현재 박물관에 봉사하는 젊은 1.5세들의 노력으로 이민 역사가 본존 가능한 디지털화 되고 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알아주는 사람도없는 역사 자료 발굴과 보존은 우리 이민사에 상당히 중요한 일이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는 말을 윈스턴 처칠이 말했다.
이 이상 우리의 역사가 방치되는 것을 막고 올바른 역사 교육과 정체성을 후손들에게 물려 주기 위해선 다음 20년의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한인들의 새로운 역사 인식과 후원이 시급한 지점에 와 있다.
hdnewsus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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