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어머니가 저에게 주신 거룩한 삶에 감사하기 위해 촛불을 밝힙니다”

  • .
  • Jun 16, 2021
  • 6 min read

<현대뉴스 창간15주년 기념 기획>

벨기에 입양인 미아 반하우트 (Mia Vanhoutte, Kim Mee Ae) 특별 인터뷰 “어머니가 저에게 주신 거룩한 삶에 감사하기 위해 촛불을 밝힙니다”

사춘기였던 저는 한국에서 가족을 찾을 때까지 항상 불안함 느껴

“저희 남매는 양아버지의 마지막 삶을 그의 뜻대로 마무리하도록 존중합니다” “양어머니는 제가 한국어를 잊지 않토록 한국어로 기도를 하도록 지혜 주셨습니다”


ree

말기 암과 중증 치매 걸린 양아버지 안톤 반호떼(중앙)와 함께한

남동생 크리스(왼쪽)와미아 / 미아반호떼 제공

지난 5월 말 본국 언론에 벨기에 입양 남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다. 그 기사에 접한 국내외 한국인들은 남매가 보여준 진정한 효(孝)에 대해 찬사를 쏟아냈다. 한국에서도 찾기 힘든 효도를 먼 나라 유럽 벨기에에 입양된 남매를 통해서 뼛속 깊이 느끼게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남매의 이야기에 감동되어 많은 눈물과 사랑을 남기었다. 이야기는 입양인 남매가 양아버지의 말기 암과 치매로 인생의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생활하는데 그 양부를 양로원에 보내지 않고 양부가 원하는 데로 집에 머물며 노후의 마지막을 자기 뜻대로 생활하는데 전적으로 떠맡고 나선 것이다. 무역업과 식당 비즈니스를 하는 남동생(크리스 50)은 양부를 저녁에 픽업하고 아침에 다시 양부를 집에 데려다주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밤에 양아버지가 혼자 자는 위험을 피하려고 동생이 집에서 모신다.누나 미아(53)는 간호사로 양부를 돌보며 항상 그의 건강을 보살피고 있다. 미아는 간호사로 재택 간호 관련 비즈니스(CEO of Lonzana Thuisverpleging)를 운영하고 있으며 남편과 세 남매(2남 21,19 / 1녀 17)를 두고 있는 가정주부이기도 하다. 기자는 지난 6월 1일부터 거의 3주간 동안 미아(Mia Vanhoutte, 한국명 김미애/ Kim Mee Ae)를 취재하였는데 미국과의 시차와 한국어가 아닌 Dutch어와 영어를 사용하는 그녀와 어려움이 있었지만, 영어의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사실에 따라 취재를 했다. 현대뉴스 창간 15주년을 맞이하여 특집 기획 취재를 통해 벨기에 입양한 남매의 감동 스토리를 인터뷰 형식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주일에 마지막 사진을 받았을 때 벅찬 감회가 몰려 왔으며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거의 3주 동안 취재에 성실히 임해준 미아 반하우트에게 거듭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김동열 기자>

인터뷰 인생은?

벨기에에서의 일상은 전처럼 그대로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정 간호 비즈니스를 계속 운영하며 가족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저희 남매에 대한 조선일보의 기사에 대한 좋은 코멘트를 많이 받아서 매우 기쁘고, 감사합니다. 우리 남매의 이야기가 많은 한국인을 감동시킨 것 같습니다.

작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 되면서 벨기에서 아시아계에 대한 약간의 인종 차별 불상사가 있었지만 개인적인 피해는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미국에서 처럼 공격적이고 폭력적이지 않았습니다.


ree

입양된 후 벨기에에서 보낸 10대 시절. 왼쪽부터 미아, 남동생 크리스, 양아버지

안톤 , 맨 끝이 양어머니 앨리스 엔젤렌 / 미아 반호떼 제공


미아의 자신 소개

저는 1968년 김해에서 김미애로 논과 작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시기에 대한 많은 세부 사항을 기억합니다. 제가 거의 4살 때 동생의 탄생, 우리 정원의 밤 나무, 사탕수수, 꽃, 겨울철엔 낚시, 그리고 돌봐 주신 할머니 대부분이 나와 내 동생의 대부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가끔 아버지를 본 기억이 납니다.

얼마 후 할머니는 아파서 더 이상 우리 남매를 돌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새로운 배우자가 생겼을 때 우리는 더는 환영받지 못하고 보육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저는 그날을 나의 인생 속에 기억할 것입니다. 차에 태워졌고, 할머니를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6살이었습니다. 내가 한국에 처음 돌아오기 1년 전에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양부모와 첫 만남

저는 1975년 동생 김성수와 함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벨기에 부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그들은 콩고에서 10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이미 40대 후반이었습니다.

동생과 저는 그들의 높은 관심과 애정 때문에 사랑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한국 고아 돌보고 싶어 우리는 살고 있는 지역 사회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지만 우리는 좋았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그 지역 사회에서 매우 활동적이셨습니다. 교사로서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의 활동적인 회원이기도 했습니다. 축복받은 어린 시절에도 불구하고 사춘기였던 저는 한국에서 가족을 찾을 때까지 항상 불안함을 느꼈습니다. 1994년 한국에서 YMCA 여름 학교에 입교했고, KBS 인터뷰 덕분에 부모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2년 후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복형제들과 함께 만났습니다. 1999년에 저는 한국 가족을 만나기 위해 남동생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잠시 후 연락이 끊겼습니다. 언어 장벽이 있었고 그 당시엔 소셜 미디어 나 이메일이 없었습니다. 2년 전에 다시 연결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만 알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소식이 없습니다. 나는 그녀와 이복형제를 포함한 다른 모든 가족을 불편한 마음 없이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는 그들을 다시 보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니까요.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고아를 돌보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간호학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한국에 대한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어서 지난 40년 동안 한국이 겪은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이에 다시 연결하여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건강 상태

아버지(안톤 89)의 상태는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그는 시력이 좋지 않고 전이가 많은 암 진단을 받아 생(生)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 있고 그의 정신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와 상태를 보면 대부분 사람은 양로원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가 집에서 얼마나 머물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고, 어머니 임종 때에 아버지를 돌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동생과 나는 그들이 우리 어린 남매를 돌보았던 것처럼 그를 온 마음으로 돌 보고 있습니다. 나는 입양 당시 7.5 살이어서 한국을 많이 기억합니다. 내가 향수병에 걸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가 나를 위해 헌신한 것처럼 그의 마지막 소원을 존중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답입니다.


양아버지를 어떻게 돌보나


양어머니는 5년 전에 축복받으면서 9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아팠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강했습니다. 양부모의 말 그들은 서로를 사랑으로 완성했습니다. 양어머니는 두뇌와 눈을 가졌고, 아버지는 발과 손을 가졌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거의 50년 이상 매일 함께했던 양부를 심하게 벼랑 아래로 떠밀었습니다.

양어머니가 사망한 후 첫해 우리는 양아버지와 함께 휴가를 떠났습니다. 태국, 필리핀, 한국, 등등…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건강 상태로 인해 더는 불가능했습니다.

물론 치매의 중간 단계를 가진 사람을 다루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 동생은 매일 저녁 그를 데리고 그의 식당 중 한 곳으로 옵니다. 아버지는 직원들과 단골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태프는 실제로 그를 한국어로 ‘오빠’라고 부르는데 또는 ‘할아버지’, ‘하라 부치’…

매일 아침 동생은 그를 집으로 모셔와 스스로 매우 시끄러운 클래식 음악과 TV 스포츠를 즐기고 잔디를 깎는다고 합니다.

나는 아버지와 동생이 사는 브뤼헤(Bruges)에서 약 100km 떨어진 앤트워프(Antwerp)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함께 살자고 여러 번 제안했지만, 낮에는 자신의 집에 머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간호사로서 저는 모든 진료 예약을 관리하고, 아버지에게 매달 주사를 주고, 약을 준비하고, 아버지가 허락하는 한 일상적인 관리를 돌봅니다.

아버지가 매일 밤 동생과 함께 지내면서 남편과 나는 며칠에 한 번씩 아버지의 건강 검진을 위해 아버지를 초대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작업량의 균형을 맞추고 동생은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합니다.

입양인들

벨기에에는 약 4,500명의 한국 입양인이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1970년에서 1990년 사이 벨기에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모여 ‘한국의 날’ 행사를 축하하고 그들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몇몇 단체도 있습니다. 대부분 입양인은 아주 어린 나이에 입양되었고 한국에 대한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입양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찾고 있습니다. 그외 벨기에에는 약 2,000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한국 입양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퀴즈, 감사, 한국문화소개, 음식, 전통 등의 행사를 조직하여 함께 즐기기도 합니다.

양어머니에 대해


양어머니에 대해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녀의 삶은 영화처럼 흥미롭습니다. 어머니는 1925 년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벨기에에서 고급 사무직을 그만두었습니다.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매우 드문 직업이였습니다. 그녀의 꿈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벨기에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콩고(Congo)에서 일하기 위해 지원했습니다. 콩고의 시골인 카사이에서 10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큰 학교의 교사이자 책임자였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위한 청소년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학생들에게 먹거리를 주기 위해 거대한 채소밭과 바나나 농장을 개발했습니다. 그녀는 현지 언어인 Shiluba를 배웠고, 죽는 날까지 (89세까지) 유창하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30세에 열심히 아이들을 돌보며 13 명의 현지 아이들을 자녀로 입양하고 다른 어머니처럼 그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그와 같은 관심과 사랑으로 내 동생과 나를 위해 느꼈게 해주었고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벨기에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를 만났고 평생 교사로 일했습니다.그들은 자녀를 가질 수 없었지만, 가족을 갖고 싶었습니다. 길고 지루한 과정 끝에 우리 남매를 입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두 명의 자녀를 요청하여 우리가 남매로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한국어 기도를 나는 벨기에에 도착하여 부모님이 데리러 공항에 나왔던 첫날 저녁을 기억합니다. 내 동생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고, 부모님은 그들이 원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녀는 나와 내 동생에게 모든 아이가 가져야 할 따뜻함과 사랑으로 보듬어 주셨습니다. 매일 저녁, 아버지가 집회하러 나갈때 우리는 그녀와 함께 침대에 기어들어 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중에야 우리는 그것이 성경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우리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대부분의 다른 가족들이 식사 전에 기도를 드리지 않았지만 나는 한국어로 기도를 하고 식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우리가 한국말을 잊을까 염려한 어머니의 지혜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요리 만들기를 좋아했고 탄산수를 넣은 유명한 브뤼셀 와플을 포함하여 가족의 모든 비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매일 겨울 저녁 우리는 벽난로에 앉아 TV에서 어린이 쇼를 보곤 했습니다. 그녀는 모든 가족 행사, 크리스마스 파티, 새해, 부활절 달걀(Easter egg)을 즐겼습니다. 10 살 때 '아름다운 그림'에서 어른이 되어 집이나 자동차 구입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암 진단을 받고 89 세에 수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집에서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장비를 준비하고 어머니의 침대를 그녀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그녀는 저녁 때 정원에서 지는 태양을 바라 보았습니다. 나만의 특별한 환자 재택 간호 비즈니스를 마치고 난 후 저는 100km를 여행하여 '나만의 특별한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나와 함께 있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매일 아침 저는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 그녀가 저에게 주신 거룩한 삶에 감사하기 위해 촛불을 밝힙니다.


 
 
 

Comments


Hyundae News USA   (415)515-1163  hdnewsusa@gmail.com   P.O. Box 4161 Oakland CA 94614-4161
                                                                                                                           ©Hyundae News USA all right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