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한 결혼은 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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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n 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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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숙 컬럼

16년 된 강아지, 밍키. 밍키의 별명은 부처님이다. 워낙 착하고 얌전해서. 밍키같이 순한 강아지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질투도 모르고 시기도 모르고 욕심도 없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지인의 강아지를 제 눈앞에서 안아주고 쓰다듬어도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밥이나 물을 먹고 있는데 지인의 강아지가 치고 들어와서 뺏어 먹어도 절대로 화내지 않는다. 옆에 가만히 비켜서서 그 강아지가 물과 밥을 다 먹고 물러나기를 기다린다. 혹시 바보가 아닌가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김치찌개를 하도 끓여서 그 냄새에 뇌 손상을 입은 것 같다는 남편의 농담이 간혹 믿어질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밍키는 바보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이를 내보이며 으르릉거릴 줄 아는 성질 있는 개였다. 그동안 그 성질을 내보일 계기가 없었을 뿐. 작년, 한국에서 유기견을 한 마리 입양했다. 유기견으로서의 아프고 서럽던 기억은 잊고 푸른 하늘처럼 희망차게 살라고 ‘블루’로 이름 지은 이 녀석, 아직 어려서 그런지 얼마나 활발하고 극성맞은지 모른다. 저지레도 심하고 장난도 심하고. 밍키를 이겨 먹고 지가 왕 행세를 한다. 굴러들어 온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말처럼. 길에서 떠돌며 굶었던 기억 때문인지 식탐이 많다. 먹을 게 보이면 누가 먼저 먹을세라 돌격하듯 덤벼든다. 위에 쓴 대로 착하고 착한 밍키는 묵묵히 블루에게 다 양보했다. 문제는 블루가 지나치게 활발하다는데 있었다. 장난이 심하다는데 있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밍키를 건드리고 치댄다. 조용히 엎드려 쉬고 있는 밍키를 올라타서 여기저기를 물어 댄다. 처음엔 밍키가 피하는 것 같았다. 다른 방으로 가버리거나 식탁 밑으로 숨거나. 그런데 블루가 끊임없이 귀찮게 하자 어느 날 와앙, 사납게 성질을 내는 것이다. 일 년 열두 달 가도 헛짖음 한번 없던 밍키가 말이다.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도 밍키는 블루가 옆에 오는 조짐을 보이면 마구 으르렁거리며 사나움을 피운다. 혼자 편하게 있고 싶으니 건드리지 말라, 이거다. 그걸 보고 깨달았다. 순하디순한 성격도 상대에 따라 나쁘게 변한다는 것을. 일흔이 넘은 지인이 있다. 음식솜씨 좋고 인심도 좋고 대화도 잘 통해서 내가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별 것 아닌 일에 신경질을 팍팍 부리고 미친 듯이 짜증을 낸다. 평소에도 그녀는 분노와 울화가 목 끝까지 가득 차 있어 보였었다. 나름대로 조절을 잘하다가 풍선 터지듯 속에 꾹꾹 눌러져 있던 화가 가끔 자기도 모르게 터지는 것 같았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다. 남편 때문이었다. 그녀가 하소연했다. 물과 불같이 안 맞는 남편을 닦달하면서 평생 살다 보니 성격마저 거칠고 난폭하게 변했다고. 아닌 게 아니라 둘이 너무너무 안 맞다. 옆에서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그녀는 급하고 정확하고 재치있고 야무지고 부지런하고 눈치도 빠르다. 또한, 남의 마음을 읽어내는데 천부적인 감각을 타고 난 사람이다. 반면 남편 되는 사람은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나 몰라라, 태평한 성격에 둔하고 느리고 게으르다. 같은 말을 서너번해야 겨우 알아차릴 정도로 센스도 없고 말도 어눌하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고 싸운다. 급기야는 자식들 앞에서 물건이 던져지고 몸싸움을 할 정도까지 갔단다. 안식처가 되어 할 집이 매일 전쟁터란다. 최근, 그녀가 이혼한단다.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단다. 그녀가 말했다. 결혼 후 50년 동안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고.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이제는 악 안 쓰고 성질 좀 안 부리고 맘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하려면 진즉 하든지 다 늙어서 이혼은 무슨 이혼이냐고 말리려던 나는 50년 동안 단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는 데에 할 말을 잊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한 번뿐인 우리의 인생, 맞지 않는 배우자를 만나 평생 살아야 하는 것만큼 더 큰 형벌은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부모와 형제자매는 길어야 이, 삼십 년이지만 배우자는 평생을 같이해야 한다. 평생 같이하는 사람이 나랑 성격과 취향과 가치관이 안 맞으면 같이 사는 자체가 불행이요, 하루하루가 지옥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 주위에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이 참 많다. 사랑해서가 아닌, 썩 마음에 드는 사람도 아닌, 꿈꾸던 이상형과는 반대의 사람이지만 나이를 먹으면 무조건 배우자를 만나 살아야 한다는 관습에 떠밀려 한 결혼이라서 그럴까. 남들도 다 그렇게 결혼해 사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고 아이 낳고 그럭저럭 수십 년의 세월을 같이 했었던 부부들. 이제 아이들은 커서 나가고 배우자와 둘만 집에 남았는데 경제적, 시간적 여유는 생겼지만, 배우자와 함께하는 일이 썩 행복하지가 않다. 행복은 고사하고 불행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한다. 젊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배우자의 외모며 성격, 말투 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싫다. 그냥 보아 넘기던 것들이 다 눈에 거슬린다. 그렇다고 싸우기도 싫고 아니, 싸우는 것도 지쳤고 싸운다고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한 지금, 차라리 관심을 접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게 된다. 각방을 쓰게 된다. 그렇다고 무우자르듯 헤어지기에는 같이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너무 무거우니까. 한 여성은 집안 저쪽에서 남편이 걸어오는 게 보이면 되돌아 와버린단다. 마주치는 게 싫어서. 얼마나 진저리가 쳐지게 싫으면, 얼마나 끔찍하게 미우면 그럴까. 한때는 애틋한 감정도 있었을 텐데.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했을까. 누군들 밉지 않았겠나. 누군들 결혼이란 제도가 멍에처럼 느껴지지 않았겠나. 그러나 그런 감정은 순간적이고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모습이 불쌍하고 안타깝다. 나보다 좋은 여자를 만났으면 더 잘 살 사람이 아닐까,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더 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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