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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수합시다

글: 이계숙


며칠 전에 비가 왔다. 얼마나 고대하던 비인지. 세상 떠난 아버지가 다시 살아 돌아 온대도 이만큼 반갑지는 않을 정도의 비. 비 오기를 기다린 게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분명히 일기예보에는 비가 오는 거로 예상되어서 떠있던 ‘비 그림’이 몇 시간 후에 보면 쨍쨍한 해나 구름으로 변하기를 수십 번. 하도 많이 속아서 이번에는 비 그림을 보고도 별 기대를 안 했더니 기적처럼 밤에 비가 온 것이다. 드디어, 마침내, 이윽고, finally말이다.

잠결에 들리는 빗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 가운을 꿰고 나가 뒤뜰로 향한 문을 열었다. 힘찬 빗소리와 함께 그동안 바짝 말라있다시피 한 나무와 화초들이 물을 흡입하는 냄새가 확 풍겨오고 있었다. 그 소리와 냄새가 얼마나 좋아야지. 뒤뜰 등나무 의자에 앉아서 한참 동안 감상하고 들어왔다.

다음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다가 들판 길 옆의 작은 웅덩이에 찰랑찰랑 물이 차 있는 걸 보았다. 늘 바짝 말라있던 웅덩이가 이번의 비로 물이 반쯤 찬 것이다. 오려면 좀 더 왔으면 좋았을걸. 벌써 4월. 이제 우기도 끝나가는데 앞으로는 비가 올 확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1200년 만의 극심한 가뭄이라는데 다시 내년 우기철을 기다려야만 하나. 얼마 전에도 캘리포니아의 가뭄에 대해 한 번 쓴 적 있지만 지금 가뭄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비가 거의 안 왔다. 나는 이렇게 가뭄에 속상한데 미국 사람들은 천하태평이다. 현재 이곳 캘리포니아의 가뭄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틀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수돗물을 평생 누렸던 사람들이기에 그럴까. 가물든지 말든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펑펑 물낭비다.

며칠 전에는 피자집 화장실에 손을 씻으러 갔다가 통탄할 일을 목격했다. 한 히스패닉 여성이 전화기를 한쪽 턱밑에 낀 채 통화를 하면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틀어놓았는지 쏴아아, 소리를 내면서 수돗물이 싱크대 수채 구멍으로 마냥 흘러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뒤통수를 한 번 후려갈기면서 ‘지금 캘리포니아가 얼마나 가물었는지 모르냐?’고 소리를 질러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폭력죄로 잡혀갈 터. 애써 모른 체하고 옆 싱크대에 손을 씻으면서 이제나저제나 수돗물을 잠글까,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애타는 마음은 아랑곳없이 여전히 소리 높여 웃어가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자그마치 몇 분이나. 참다못한 내가 얼른 다가가서 급하게 수도꼭지를 잠갔다. 화들짝 커지는 그녀의 눈동자. 아차, 했지만 나는 황급하게 변명했다. 전화통화하느라 바빠서 수도 잠그는 것을 잊은 것 같아서 내가 대신 잠구었어…

지금은 재택근무를 하기에 그런 꼴을 볼 수 없지만 내 직장에도 물 낭비를 일삼은 직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위의 피자집에서 본 여성같이 휴게실이나 화장실의 물을 틀어놓은 채 옆 사람과 잡담을 하거나 화장, 머리를 매만지고 고치는. 특히 그중에는 점심으로 먹은 플라스틱 그릇 한 두 개를 닦고 또 닦아대는 여자가 있었다. 비누칠을 할 때는 물을 좀 잠가도 좋으련만 마냥 틀어놓은 채. 나랑 친하지 않은 동료라서 간섭은 못했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었다. 자기 집 물이면 저렇게 막무가내로 낭비를 할까, 싶어서. 이번, 우리집 수도세가 42불 나왔다. 두 달에 한 번씩 내는 거니 한 달에 21불 꼴이다. 물론 잔디를 없애고 화장실 변기를 모두 절수형으로 교체하고 사워를 같이 하고 허드렛물을 모았다가 화초에 주는 등 엄청 노력한 덕이다. 예전에는 겨울에는 백 여불, 여름에는 2백 불까지 냈었다. 그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낮은 숫자다. 물값을 덜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뭄에 물을 아끼기 위해 애쓴 것뿐인데 부차적으로 수도세 절약이 따라온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에 비해 물을 많이 낭비하는 편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종용한다. 보기에만 좋을 뿐인 잔디를 걷어내고 화초 몇 그루만 심으라고. 절수형으로 변기를 교체하라고. 그게 힘들다면 샤워도 자주 하지 말고 일주일에 한 번만 하라고. 아니, 보름에 한 번만 하라고. 물론 농담 비슷하게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 상태의 가뭄이 지속되다가는 진짜로 샤워를 보름에 한 번만 하는 걸로 법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정부에서 강력한 조치를 실행해야 한다. 현재의 물값을 몇 배로 올려버리든지 종량제, 누진제를 실시하든지. 공공장소의 모든 수도꼭지를 정수형으로 교체하든지. 자율에 맡겨서 안 되면 강제성을 띄워야 하지 않을까. 이 가뭄이 해갈될 때까지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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