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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것은 모래에 새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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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l 14, 2021
  • 2 min read

이계숙의 일상

한국에 사는 친구 희주로부터 소포를 받았다. 십만 원이 넘는 송달료를 부담하고 보낸 소포에는 여러가지 다채로운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최근 한국에서 히트쳤다는 라면, 고춧가루, 대추 과자와 대추,(희주는 대추가 특산품인 고장에서 산다) 그리고 화장품.

한국 물건들의 겉모양이 유난히 화려하지만, 희주가 보내준 화장품은 유독 더했다. 금박으로 번쩍번쩍 칠갑이 된 데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얼마나 좋은 것이길래 이렇게 용기와 포장이 휘황찬란할까 하고 인터넷에서 상표를 검색해보던 나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하나에 몇십만 원이 넘는 것이었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기껏해야 십몇 불짜리 화장품이 고작인 나는 손 떨려서 만져도 못 볼. 그렇게 비싼 것을 아이크림, 영양 크림 등 골고루 다섯 개나 부쳐준 것이었다. 더구나 희주는 소포에 넣은 쪽지에 말했다. 화장품 다 써거든 연락하라고. 더 부쳐주겠다고.

고맙기는 하나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희주가 경영하는 한우식당이 늘 손님들로 만원이라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내가 이런 비싸디 비싼 화장품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희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됐다, 희주야. 지금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앞으로는 안 부쳐줘도 된다. 희주가 대답했다. 친구야, 약소하다. 네가 나한테 베푼 것에 비하면. 나는 기억하고 있단다. 아주아주 오래전, 네가 사준 짬뽕 한 그릇을.

희주의 말인즉슨 저나 나나 궁핍하고 곤궁하던 시절의 어느 겨울날, 내가 주머니 돈을 다 털어 짬뽕 한 그릇을 사주었다고 했다. 두 그릇 살 돈이 없으니 한 그릇만 사서 나는 안 먹고 자기만 먹게 했단다. 그게 지금까지도 고마움으로 남아서 언젠가는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난봄, 한국에서 만난 친구 선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아주 오랜만에 나를 우연히 시장 거리에서 만났다고 했다. 당시 '게맛살'이 처음 출시된 때였는데 처음 출시된 거라 가격이 만만치 않았단다. 그런데 행색도 초라해 보이던 내가 선자한테 게맛살 몇 봉지를 사주었단다. 집에 갈 때까지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봉지를 찢고 꺼내 먹었던 게맛살의 맛을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면서 선자는 고마워했다.

희주한테 사줬다는 짬뽕, 선자한테 사줬다는 게맛살,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두 그릇 시킬 돈이 없어 친구만 먹게 하고 그 앞에서 입맛만 다시고 앉아 있었을 당시의 나를 생각하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지금은 거저 줘도 안 먹지만(가능하면 밀가루를 멀리하려고) 그때 내가 제일 좋아하던 음식이 짬뽕이었었는데. 그리고 처음 나와 가격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친구 만나 반갑다고 얼른 게맛살 몇 봉지를 사서 안겨주었다는 당시의 내가 참 기특하다. ‘준' 사람은 까마득히 잊고 있는데 '받은' 상대는 고마움을 오래 간직하고 있는 경우를 가끔 본다. 특히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받은 도움은 평생 잊지 않게 된다.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신문사에서 일하며 혼자 살 때, 밤에 취재를 다녀오다가 물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출고한 지 며칠밖에 안 된 새 차의 모터가 나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막막했다. 생각나는 사람은 주유소를 경영하는 P씨 부부. 다음 날 아침, 그들의 도움으로 차를 정비소로 토잉시킬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이 일을 해결 하나, 생각하며 그 부부 사무실에서 망연자실 앉아 있는데 부인이 옆 식당에서 우동을 한 그릇 시켜 다 주었다. 뜨거운 걸 먹으면 힘이 날 거라면서. 그리고 200불을 담은 봉투를 내 핸드백에 찔러 넣어 주었다.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내 형편이 풀렸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고가의 화장품 세트를 P씨 부인에게 선물한 일이었다.

W씨도 P씨 부인에게 고마운 게 있다고 했다. 70년대, 한국에서 처음 와 모든 게 생소하고 낯설어 어리둥절하고 불안할 때 P씨 부인이 오빠, 언니, 부모 등 열 명이 넘는 W씨 식구들 전원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단다.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면서 힘들지만,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W씨는 그 고마움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기회가 생겨 P씨 부부에게 보은할 수 있었단다. ‘준 것은 모래에 새기고 받은 것은 바위에 새기라'는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해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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