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까불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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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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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숙의 일상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봄옷을 꺼내 입어보다가였다. 작년에도 별 무리없이 잘 맞고 잘 어울렸던 옷들이 영 어색해 보인다는 걸 알았다. 가슴과 어깨부분이 꽉 쬐고 배 쪽이덜렁, 들린다. 겨울동안 두꺼운 옷 속에서 바람든 풍선처럼 몸이 두리둥실해진 것이다. 목과 어깨와 등이 두툼해지고 팔뚝과 허벅지는 더욱더 우람해졌다. 뭘 입어봐도 ‘물찬 제비’같던 예전 맵시가 안 난다.
‘나잇살’이라는 게 찐 것이다. 매일 걷고 뛰어도 나이가 나이니만큼 아무래도 운동으로는 한계가 생긴 것이다. 마침내, 드디어 식생활을 조절할 때가 온 것이다. 문제는 나의 주식이 온통탄수화물뿐이라는 데 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밀가루음식, 그중에서도 국수다. 하루 세끼, 국수를 먹으라 해도 싫다 소리를 안 할 정도로. 그러나 국수는 손이 많이 가는지라 꿩대신 닭이라고 라면을 자주 먹는다. 일 주일에 두어번은 라면으로 저녁을 떼운다. 또한 매일 김치와 밥만 먹다시피 한다. 외식을 해도 고기나 채소보다 밀가루나 쌀이 들어간 걸 선호한다. 몸무게를제일 많이 늘린다는 탄수화물로 매일 삼시세끼를 채우는 것이다.
거울 앞에서 나는 결심했다. 라면과 밥에서 탈피하기로. 탄수화물을 멀리 하기로. 탄수화물 안 먹기 다이어트에 돌입한 것이다. 그래서 성공했냐고? 아니,못했다. 보통 의지갖고는 되는 일이 아니었다. 사흘하다가 집어치워버렸다. '작심사흘'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은 것이다. ‘그 까짓 것'하고 호기롭게 시작한 결심이 딱 사흘째 가서 무너지고 만 것이다. 도대체가 탄수화물 빼고는 먹을 게 없어서.
첫날 저녁 메뉴는 채소에 닭고기(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닭고기다)였다. 닭 허벅지살에 마늘과 간장을 듬뿍 넣고(닭냄새를 줄이려고) 졸여서 호박볶음이랑 먹었다. 둘째날은 슴슴하게 만든 김치찌개만 한 대접 먹었다. 밥을 두어 숟가락 말았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눈 질끈 감았다.
사흘째 되는 날, 아무리 둘러 봐도 먹을 게 없었다. 남편 먹으라고 아침에 만들어 놓은 카레랑 고슬고슬하게 지어놓은 밥밖에. 할수 없이 냉동고에서 꽝꽝 얼어있는 스파게티소스를 전자렌지에 녹여서 반 대접 숟가락으로 퍼먹었는데 몇 시간이 지나자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속이 허한 것 같다. 밥과 라면으로 매일 빵빵하게 불러있던 배가 스파게티소스 반 대접으로 양이 찰 리가 있나.
컵라면이라도 하나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아니되는 일. 식욕을 지우려 랩탑을 무릎에 놓고 소파에 앉았는데 좌불안석이 되었다. 도통 마음이 안정이 안 되는 것이다. 반드시 이행해야 할 큰 일 하나를 빠드린 것처럼. 일어나서 방안을 왔다갔다하다가 나도모르게 발걸음이 부엌으로 옮겨졌다.
활짝 열어본 냉장고 안에는 지인이 담아다 준 '갓김치' 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걸 보는 순간 눈이 확 돌아가면서 에라, 모르겠다가 되어버렸다. 이 나이에 살 빼서 새로 시집갈 있나, 내일 산수갑산을 가더라도 일단은 먹고나 보자가 된 것이다. 밥 한 양푼에다 갓김치 한 대접을 놓고 식탁에 앉았다. 밥과 함께 벌건 양념으로 칠갑을 한 갓김치를 입에 넣는 순간 아, 이게바로 천국의 맛이구나 싶었다.사흘동안 주렸던 배를 밥과 갓김치로 채우면서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탄수화물과는 절대 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탄수화물에 단단히 중독되어있다는사실을.
여지껏 나는 반드시 중단하거나 고쳐야만 할 나쁜 습관이 없다는 걸 큰 자랑으로 삼고 살았다. 한번 정한 건 죽어도 지켜야만 하는 나의 성격을 다른 사람이 본받아야 한다는 우월감도 넘쳤었다. 그래서 주위사람들을 마구 닥달했었다. 담배 못 끊는 할배들한테 '의지박약'이라는 막말을 서슴치 않았고 틈만 나면 카지노로 향하는 몇몇 지인들을 '노름꾼들'이라고 마음놓고 비웃었고 뒤룩뒤룩 살 찌는 사람들을 미련하고 게을러 터졌다고 한심해 했었다. 단 한번도 그들 사정을 헤아려보지 않았다.
자다가 일어나서 시도해도 성공할 줄 알았던 탄수화물 끊기를 고작 사흘만에 실패하면서 깨달았다. 그동안 어줍잖게 남의 일에 간섭하고 충고하고 가르치려 들었던 내가 참으로 교만했다는 걸. 남에 대해 쉽게 정죄하고 판단할 게 아니다. 남의 신발을 신어보지 않고 함부로 그 사람 사정에 대해 평하지 말라는 미국 속담이 괜히 생겼겠나. 앞으로는 좀 겸손해야져야겠다. 왜 그 쉬운 것도 못하느냐고 쉽게 남을 비난하지 않으리. 내 절제력을 본 받으라고 함부로 까불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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